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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선 CEO 칼럼] 통신혁명과 대한민국 IT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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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2008. 11. 6
[김홍선 CEO 칼럼] 통신혁명과 대한민국 IT 시대정신 

본 호에는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대표의 CEO컬럼을 보내드립니다.
회원분들께 유용한 정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홍선 CEO 칼럼] 통신혁명과 대한민국 IT 시대정신  

발단(Trigger) II : 통신혁명

지난해 6월 세미나 발표를 위해 인도네시아에 간 적이 있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가서 이메일을 보기 위해 노트북을 켠 순간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인터넷을 연결할 케이블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호텔 방에 비치된 가이드 북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결국 인터넷을 연결하는 방법을 찾기는 했는데, 모뎀이라는 용어와 연결할 전화 번호가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접하는 용어이다 보니 한편 당혹스러우면서도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

‘어떻게 했었지’ 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다가 그제서야 아주 기본을 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작 모뎀을 연결할 소프트웨어도 없었고, 내 노트북은 아예 모뎀을 연결할 하드웨어가 없었던 것이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가장 최고급 호텔 방에서 인터넷을 연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나니 망연자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 우리의 통신 환경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다이얼업 모뎀(Dial-up Modem). 이 단어를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 이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룡처럼 사라졌다고 나는 단정했었다. 그런데, 지구촌 한 곳에서는 버젓이 사용되고 있고, 내가 그것을 버린 지가 불과 몇 년 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풍속도 ? 게임방

IMF 이후 우리 나라에서 크게 바뀐 풍속도 중 하나가 ‘게임방’이다. 해외에서 인터넷 카페라고 불리는 모델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는 온라인 게임이라는 킬러 서비스와 만나면서 그 사업 자체가 서비스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게임방은 선풍적인 인기 속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게임방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을 목적으로 가지만, 아울러 채팅과 인터넷을 즐기는 공간으로 그 용도가 확대되어 갔다.

우리 나라에서 ‘방’ 형태의 사업모델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방’문화의 대표격인 가라오케(노래방)은 대중적 서비스로 우리의 생활문화로 깊이 자리잡았다. 이후 노래방은 가전제품이나 PC카드, PC통신의 형태로도 가정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소음 때문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집단 거주 형태가 흔하고 인구 밀집도가 높은 우리 사회에서 이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방의 경우는 달랐다. 일단 소음이 적기도 하지만 이미 PC가 크게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정으로 진출하는데 큰 장애는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통신수단이었다. 90년대에 인기가 높았던 PC통신이나 인터넷을 가정에서 사용하려면 아날로그 전화에 모뎀을 연결한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접속을 해야 했다. 이 방식은 기존의 전화선을 데이터통신 형태로 확장한 것이라서 통신을 하는 중에는 전화기는 계속 통화 중 일수 밖에 없었다(이 문제는 가족들간의 크고 작은 분쟁을 가지고 온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최대 대역폭도 초당 56Kbps 수준에 머물러 지금과 같은 동영상 파일 다운로드나 실시간 스트리밍은 꿈꾸기도 힘들었다. 통신 사업자들이 ISDN(종합정보통신망)이라는 차세대 서비스로 전화와 데이터 라인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을 연구 개발하여 전세계적으로 시험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전체 통신망을 다시 구축해야 하는 장기적인 과제였다.

Broadband 통신의 탄생

이 느린 전송률로 웹을 검색하고 게임을 하려면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당연히 홈페이지가 텍스트 위주이고 영상이나 멀티미디어를 표현하는데 최대의 장애물이 대역폭(Bandwidth)이었다. 이 때에 ADSL이라는 통신기술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 개발된 ADSL 기술은 본래 VOD(Video On Demand)를 기존 전화망에서 가능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왜 그런 서비스가 필요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영화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1980년대에 영화산업은 극장 위주에서 가정에서 즐기는 형태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비디오(VCR)가 보편화되어 TV와 더불어 필수 제품으로 자리 잡았고, 이를 발판으로 비디오 대여 사업이 크게 각광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와 같은 대형 렌탈 업체가 시장을 주도했고, 케이블이 각 가정에 들어가면서 영화만 24시간 방영하는 HBO, Cinemax와 같은 전문 채널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중반부터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가게가 생겨나서 90년대 초에는 피크를 이루었다.

전화통신사업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통신망을 활용한 비디오 서비스를 생각해 내었다. ADSL의 A는 비대칭이라는 의미인 Asymmetric의 약자로서 콘텐츠를 가정에 공급하는 다운스트림(down-stream) 대역폭이 그 반대방향의 대역폭(up-stream)보다 훨씬 크게 설계되었다. 각 가정에서 기존 전화선을 통해 대용량 비디오를 다운로드 받는 서비스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ADSL 기술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기존 비디오 대여나 케이블 업체들이 홈비디오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경기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통신 사업자가 주관하는 VOD는 탄력을 받기 힘들었다.

그런데, ADSL은 90년대 후반에 들어 가면서 더 막강한 서비스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인터넷의 폭발적 보급이다. 가정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데 인내로 버티던 많은 이들에게 ADSL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ADSL은 기존의 전화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기존의 속도보다 10배 이상의 빠른 서비스를 보장했다. 이제 남은 것은 통신 사업자의 의지였다. 결국 통신사업자는 ISDN을 통해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하려던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소위 브로드밴드(Broadband) 통신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브로드밴드는 초당 56킬로비트(56Kbps) 밖에 전송하지 못하는 다이얼업 방식 대비 수 배에서 수십 배의 대역폭을 보장하는 통신 방식을 일컫는다. FCC(연방통신위원회)는 브로드밴드는 적어도 200Kbps 이상의 대역폭을 보유해야 하고 상시접속(Always-on)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브로드밴드의 영역에 들어가는 DSL, 케이블통신, 광통신, 전력선, 무선랜 등의 기술은 이 개념에 충실함을 알 수 있다.

브로드밴드는 가정과 중소기업에 불어 온 통신혁명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브로드밴드가 제시한 명확한 특성은 통신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 역사적 의미가 있다.

첫째, 초고속 통신의 제공이다. 각 가입자가 받을 수 있는 대역폭(bandwidth)이 획기적으로 커졌고, 이로 인해 멀티미디어 정보의 교환과 쌍방향 통신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속도의 돌파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통신과 방송, 미디어의 융합의 패러다임은 초고속 통신의 초석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상시접속(Always-on) 개념의 도입이다. Dial-up 방식의 모뎀을 접속하고 ‘삐’하는 전화 연결음을 들어야 하는 시대가 있었다. 브로드밴드는 개인과 개인을 시그널링(signaling)에 의해 연결하는 전화의 개념에서 항상 연결해두는 접속의 형태로 바꾸었다. 네트워킹에서 접속 과정을 생각해야 하는 과정에서 자유로워지게 된 것이다.

셋째, 통신요금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만일 전화요금처럼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통신비용이 부과되었다면 인터넷의 ‘무료’ 개념은 크게 퇴색되었을 것이다. 월정액 기준으로 무한사용의 시대가 열리면서 통신업체의 사업모델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게다가 가입자를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통신비용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통신요금은 앞으로도 서비스의 발전과 무한경쟁 구도하에서 지속적으로 인하 될 것이다. 통신업체가 사업 모델을 바꾸지 않으면 생존이 안 되는 시대로 바꾼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IT가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으로

브로드밴드는 한국을 최고의 IT강국으로 도약하게 한 주춧돌이기도 하다. 1999년에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브로드밴드 도입은 2000년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전 세계에서 최대 인터넷 사용자 보유비율을 자랑하는 국가가 되었다. 다이얼업에서 ADSL로 그리고 VDSL을 거쳐 광랜이라 불리는 FTTP와 FTTH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아래와 같다.

정부에서는 IMF 이후 IT를 국가 성장동력으로 규정하면서 초고속통신망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각 개인들도 온라인게임, 인터넷뱅킹, 온라인주식거래, 홈쇼핑 등 새로운 사이버문화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활한 지역에 집들이 떨어져 있는 미국과 달리 아파트 단지 형태로 조밀하게 모여 사는 한국의 주거문화는 통신인프라의 업그레이드가 용이한 면이 있었다.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문화이기는 하지만, 집까지 연결하는 통신구간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주춤했다. ISDN에 누구보다 투자를 많이 했던 NTT로서는 초고속인터넷의 욕구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한 면이 없지 않다. 반면 한국은 KT와 하나로통신의 치열한 경쟁 속에 브로드밴드의 보급에 불이 붙었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과 IT는 한국 사회를 이끌어간 시대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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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대표
 
 * 출처 :  안철수 연구소 (http://www.ahnlab.com)

  -건설연구정보센터 기술지원부 연구원 박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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