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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탐험 -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설치된 서울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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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2008. 4. 11
도시탐험 -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설치된 서울의 거리

 

□ 몽골과의 교류

한 때 세계의 절반을 정복한 칭기즈 칸(칸이란 왕을 뜻함)의 나라 몽골, 고려를 6차에 걸쳐 침공한 나라, 강화도 항쟁과 삼별초 혁명을 일으키게 한 나라,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원인 제공을 한 나라, 아시아에서 최초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나라, 1990년 공산국가에 불어온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에 의해 아시아 최초로 공산주의를 포기한 나라, 아시아 공산국가중 최초로 우리와 수교를 한 나라, 자유화 이후 스탈린과 후루시초프의 동상을 파괴한 나라, 그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를 방문하는 기회가 필자에게 주어졌음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1995년은 우리나라와 몽골의 국제교류 1,000년이 되는 해이다. 995년 고려 유학생 10명을 거란에 파견하여 몽골어를 배우도록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제 1권에 기록되어 있다. 1,000년이 지난 1995년 10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조순 시장이 방문하여 서울과의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를 기념하여 울란바타르에 ‘서울의 거리’를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설계하기 위하여 1996년 2월과 4월, 2번의 공식적인 방문을 하였으며, 1997년 7월에는 공무원 20년차에 주는 휴가를 얻어 개인적으로 3번째 방문을 하게 되었다.

□ 울란바타르

국토 면적 156만5천㎢에 인구 250만 명의 몽골, 그 중 60만 명이 거주하는 울란바타르는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건립된 3- 5층의 사무실 건물들과 5층, 10층형의 아파트, 단층 판자집과 텐트(게르, Ger)가 함께 어울어진 도시였다. 최근 여러 곳에서 건축물들을 신축중이다.

강수량이 부족하여(년 중 200 - 300mm) 시내는 나무가 적은 편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수도 주변의 산들은 거의가 초원으로 된 민둥산이며, 나무는 특이하게도 한쪽 방향의 비탈에서만 자란 것을 볼 수 있다. 눈이 녹지 않는 곳에서만 나무가 자란다는 것이다. 겨울이 길어(10월에서 4월까지) 도시가 황량하게 보인다. 그러나 6월에서 8월의 몽골은 휴양하기에 아주 적합한 기후와 풍광을 지니고 있다.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지만 넓고 직선으로 뻗 어 있으며, 차후 도시가 팽창할 때 도로의 확장은 용이할 것 같다.

거리를 누비는 대부분의 차량은 낡고 고장난 것들이 많다. 자국에서 생산하는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마치 외국 자동차의 경연장 처럼 보인다. 구 소련의 라다 등 동구권의 차량이 택시로 많이 활용되는데 78만Km를 달린 경우도 버젓이 운행하고 있었다. 벤츠나 BMW등 고급 차량이 많으나 대개 중고 차량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깨끗한 차량은 소나타, 액셀, 갤로퍼, 스포티지 등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 몽골,몽골인

필자가 만난 몽골인들의 인상은 매우 좋았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들은 친절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를 위한 안내와 준비를 결 코 소홀하지가 않았다. 과공비례(過恭非禮)일 정도였다.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서울의 거리를 조성하는데 투자의 정도를 높이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세 번째의 여행에서 나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친절은 그들 생활의 일부였다. 유목민의 특성상 집단 거주가 불가능하고, 가축을 따라 항상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 Km를 가야 겨우 몇 집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손님에 대한 그들의 친절은 필연적이다.

아이락(일명 마유주라고도 한다. 말 젖을 소가죽에 담아 두 세 달 정도 발효시켜 약간의 알콜 성분이 있도록 숙성 시킨 것으로 신맛이 난다)을 제공하고 우유와 아롤(우유를 발효시켜 딱딱한 빵처럼 만든 것으로 신맛이 난다)을 내어 놓는다.

그들이 귀한 손님에게 가장 아끼는 담배(가루로 되어 냄새를 맡는다던가 콧구멍 속으로 흡입한다)를 정중히 권하는 모습에서 가식(假飾)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몽골인들은 미리 잡아 논 고기가 있다 하더라도 손님을 위하여 새로운 양을 잡는다. 몽골의 옛날 법전에서도 목마른 사람에게 쿠미스(말젖)를 요구받고도 거절하거나 하룻밤 숙박을 거절하여 손 발에 동상을 입게 할 경우 양이나 말 1마리를 배상해야 하는 강제 규정을 두고 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그러한 친절이 있었음을 기억할 때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대평원의 뭉개 구름과 말발굽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초원에 설치된 휴양촌의 겔에 도착한 시간은 오랫만에 내린 비가 겨우 그친 시간 이였다. 마침 그 시간에 쌍무지개가 필자를 반기고 있었다. 무지개를 ‘솔롱고’라하는 데, 그들은 한국을 ‘솔롱고’,한국인을 ‘솔롱고스’라 부른다. 한국 사람인 필자가 그 곳을 방문하였기 때문에 솔롱고(무지개)가 떴다는 것 이였다.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美國)로 부르는 것과 쌀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米國)로 생각하는 차 이처럼 그들은 한국을 무지개 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으로 입국한 무지개 나라 한국에 불법 체류자가 몇 천명이 넘는다고 했다. 과연 그들이 무지개를 잡을지 모르지만 아직 몽골에서의 한국은 무지개 처럼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 음은 사실이다.

1990년 3월, 양국간의 수교로 지난 80년간의 단절된 관계가 청산되었다. 1992년 몽골 국립 대학교에 한국어과가 생겨 1996년 6월에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심지어 소학교나 유치원에서까지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니 그 열기는 알만하다.

몽골인의 외국어 습득 능력은 대단하다.

70년간의 러시아 지배를 받은 결과 러시아어는 기본적으로 할 수 있으며, 영어를 구사하는지식인들을 보면 웬만한 본토 발음을 능가한다. 한국어를 한국인 뺨치게 잘 하는 사람도 여럿이 있다. 그렇게 쉽게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 특유의 인체 구조나 언어 구조에 기인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연한 인연으로 몽골 유학생인 후란 양을 필자의 집에 데리고 있게 되었는데 한국어를 아주 잘 하는 편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왔을 땐 자기 나라에서 한국어를 3개월 배웠다는데 웬만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깜짝 놀랐다. 연세 어학당에서 2달을 배우고 현재 서울 시립 대학교 경제학부 1학년에 유학 중이다. 일취월장하는 그를 볼 때마다 여간 신기하지가 않다.

울란바타르에서 만난 몽골인들의 입에서 한국어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다. 경제력이 국력인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그들로 하여금 한국어를 사용하게 한 것이다.

□ 너무나도 닮은 모습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던가 갈림길에서 갈 길을 정할 때 손바닥에 침을 뱉어 손가락으로 쳐서 튀는 방향으로 목적지를 정하는 몽골을 풍습은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다.. 돌무덤(오보라고 함)을 지나칠 때 돌맹이를 던지고 합장 기원하는 모습은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아직도 볼 수가 있다. 첫 술을 마시기 전 손가락에 뭍여 세 번을 공중으로 튀기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고시래’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우리나라 사람과 몽골인들의 공통점인 몽골 반점을 보면 왠지 남남이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더구나 사용하는 언어도 흡사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송골’은 ‘송골 매’를 말한다. ‘가라’는 제주도의 ‘가라(검은) 말’을 일컬음이며, ‘누구에게’라고 말할 때에는 ‘...게’라고 한다. 친척은 ‘사둔’이라 하는데 ‘사돈’과 비슷한 뜻이다. ‘바른(오른) 쪽으로’는 ‘바른 죽으로’라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제주도의 방언중 몽골어와 관계 있는 어휘는 약 24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석 주명의 제주도 방언집)

닮은 외모와 유사한 풍습, 비슷한 언어를 접하면서 몽골인들을 결코 다른 민족으로 생각되 지 않았다.

□ 몽골의 문제

그러나 현재의 몽골인들에게서 칭키즈 칸의 위대한 모습을 발견하기에는 너무나도 긴 공백이 있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인공위성에서도 보이는 만리장성은 몽골인을 두려워하여 중국인들이 축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칭기즈 칸이 사망 후 겨우 40년 만에 분열되고 지리멸렬하게 되어 200여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들에게 유목 민족의 특성인 씨족사회의 단결력을 와해하기 위하여 장남 이외의 남자로 하여금 반드시 라마승이 되도록 법률로 정하였다.

라마승이 되면 결혼을 할 수 없는 대신 병역을 면제하고 풍족한 생활을 보장해 줌으로 한 때는 몽골 남자의 절반이 라마승이 된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몽골 인구의 감소와 경제의 파괴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후 1921년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한 몽골은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러시아도 몽골인의 기백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성(性)을 폐지한 일본 판 창씨개명의 정책을 도입하였다.

또한 몽골의 고유 글자(위구르 문자)가 복잡하 다 하여 이를 없애고 러시아 문자(키릴 문자)를 빌려 쓰게 하므로 지금의 노년층과 장년층 은 전혀 몽골 문자를 해득하지 못한다.

몽골인들은 손님을 접대하면서 끊임없이 술을 권한다. 40%의 알콜 농도를 지닌 보트카를 권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니 안마시고 못 배긴다. 별도의 술자리가 있는 게 아니고 식사시간 전 과정을 술과 함께 시작해서 술로 마무리한다. 그들은 결코 술을 떠나서는 생활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도 국민의 10% 이상이 알콜중독자라는 통계도 있다. 원래 몽골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칭기즈 칸의 대야사(법전) 제 33조와 칭기즈 칸의 격언에 의하면 ‘만약 술을 끊을 수 없으면 한 달에 세 번 마시며 세 번을 넘을 때는 이를 벌한다. 만약 한 달에 두 번 마신다면 괜찮고 한 번이라면 칭찬해야 한다. 전혀 술을 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울란바타르시의 도시계획국장의 명함엔 ‘Tumuriin Jadambaa’ 라 되어 있다. ‘미스터 트무린’이라고 불렀더니 자신을 ‘쟈담바’라고 불러 달라는 것 이였다. ‘트므린’은 아버지의 이름이고 ‘쟈담바’는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몽골인에게는 성(性)이 따로 이 없다. 원래 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지배하면서 부터 없어진 것이다. 씨족사회의 단결력을 와해하기 위하여 성을 폐지하는 대신 자식의 이름 앞에 아버지 이름을 붙여 쓰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의 아버지 이름이 갑동이라면 철수는 ‘갑동 철수’가 되고 영희는 ‘갑동 영희’가 된다. 갑동의 동생이 을동이라면 을동의 자녀는 ‘을동 기철’ ‘을동 영숙’이 되어철수와 기철, 영희와 영숙이 사촌간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만약 그들 사촌들이 멀리 떨어져 살게 될 땐 친척임을 모르게 되어 결혼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근친혼은 저능아를 태어나게 할 확률이 많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소규모 단위로 거주하는 몽골의 생활 풍습을 감안할 때 성을 없앤 70년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근친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3백 여년에 걸쳐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몽골인을 우매화 시켰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라 잃은 설움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아 창씨개명을 하였다면 그들의 운명과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몽골리즘(Mongolism)’이란 거창한 몽골의 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몽고증 환자’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다. 몽고증(蒙古症) 환자란 백치병(白痴病) 환자의 다른 말인데 요즘은 이를 영국의 의사 이름을 따서 ‘다운 증후군(Down’s syndrome)’이라 부른다. 그 만큼 몽골에는 백치 환자들이 많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국가 명에 -ism을 붙여 병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만약에 Korea에 ism을 합성하여 어떤 병명(病名)으로 사용한다면 어떠하겠는가? 몽골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비하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민주화된 오늘날의 몽골인들은 칭기즈 칸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펼치고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잃어버린 성(性)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사라진 몽골의 옛 글자를 교육시키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민주화를 향한 시민의 역량을 결집시키고 있으며, 육식 위주의 생활에서 채소를 심고 가꾸는 등 생활 양 식의 개선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마치 우리나라의 1960년대 ‘새마을 운동’을 연상하게 한다. 그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오늘날 우리가 이룩한 경제성장만큼 반드시 이룰 것이라 믿는다.

□ 울란바타르의 한국인들

그들의 변화를 바라면서 몽골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기여를 하고 있다. 선교 사업을 위해, 의료 지원을 위해, 교육 사업을 위해, 경제활동을 위해 약 250여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 나 그 중에선 우리나라의 명예를 더럽히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 중 잊을 수 없는 두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 분은 울란바타르에 있는 연세 의료원 전 의철 원장의 부인 김 광신 여사의 이야기다. 그녀는 정년 퇴직한 남편의 의료 선교 사업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낮 설고 물 선 이국 땅을 찾았다. 고국에서의 정들었던 아름다운 집을 뒤에 두고 돌아설 때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하나님이 소돔 지방을 불로서 멸망시킬 때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에게 천사들이 와서 가족을 데리고 피하되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했는데, 롯의 아내가 두고 온 재산에 미련을 두어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성경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고 하였다.

제21대 사임당에 등극할 정도의 사회적인 명예와 지위도 모두 버리고 남편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더구나 그분은 당뇨병을 앓고 있어 몸에 설치한 기계의 도움 없이는 거동이 불가능할 지경 이였지만 정기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찾아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지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리본플라워와 뜨게 질, 바느질 기술을 가르쳐 생계에 보탬이 될 일들을 찾아 사랑을 펼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하기 때문에 유한 부인들이 취미로 배우겠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국립 대학교 한국어과 학생을 상대로 한국의 예절을 가르치며 한국을 바로 알리기에 여념이 없으신 그 분은 매년 1천만원씩 몽골의 불우 기관에 기부를 한다고 했다. 한달 급여가 5만원인 몽골에서 1천만원이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매달 1백만원의 생활비를 사용했는데 몽골에서는 1년에 2백만원이면 충분하여 나머지 1천만원씩을 벌써 4번이나 기부를 하였고, 이제 남은 재산이 1천만원 밖에 없는데 내년에 그것마저 바치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를 것 같다고 하였다.

다른 한 분은 ‘울란바타르 대학’을 설립한 윤 순재 목사님의 이야기다. 1995년 6월에 몽골 정부로부터 정식 대학 인가를 받아 한국어과를 시작으로 출발하여 1997년 9월에는 경제학과 컴퓨터학과 까지 개설하여 7:1의 경쟁을 거쳐 신입생을 선발하 였다고 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몽골 기준의 보수만 받고 교수로 자원봉사하고 있으며, 사 립 대학 중 학비가 저렴하여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몽골에서 국립대학에 버금가는 유명한 사립 대학교를 만드는 것이 그 분의 포부라 하였다. 교육 선교 사업에 뛰어든 그분에게 갈채를 보낸다. 이런 분들이 있는 한 한국과 몽골의 관계는 영원히 아름답게 이어져 갈 것이다.

□ 서울의 거리에서

울란바타르를 떠나기 전 ‘서울의 거리’를 돌아 보았다. 감회가 깊었다. 서울의 거리를 설치 하기 위하여 필자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계획하고 설계하여 시공된 그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은 여간 보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의 거리’는 연장 약 2.5Km로서 울란바타르시에서 2번째로 중요한 도로이다. 그 도로를 따라 대통령 관저와 러시아 대사관이 있으며, 연극 공연장과 써커스 전용 극장,나란 슈퍼마켓과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나란 슈퍼마켓 앞에는 보도 블럭을 새로이 포설하고 현대식 버스 정류장을 설치하였다. 서울의 거리 전 구간에 서울 시청 앞에 세워진 거리 안내 입간판과 똑 같은 안내판 6개와 화살표 모양의 가로 지시 간판을 6개소에 설치하였다. 택시 정류장 1개소와 이동식 화분도 설치하였다.

이 모든 시설물들은 서울에서 제작하여 현지로 운반하여 설치한 것들이다. 서울의 거리 중간쯤의 위치에 이 희승씨의 글씨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글귀가 한글과 몽골어로 새겨진 비석이 서있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단군의 건국이념을 몽골의 수도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 감회가 새롭지 않았다. 현지 교민들도 서울의 거리로 인하여 자부심을 갖는다고 하였다. 비석이 있는 부근에 한국인 교회가 있는데 그 곳을 통 하여 한국인들의 모임이 활발하다고 하였다. 시설물이 설치된 지 1년이 지난 현재 몇 개의 시설이 파손되긴 하였으나 대부분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한가지 반가운 것은 몽골의 국영 TV에서 우리나라에 관한 특집 방송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1997년 7월 17일 저녁 시간대에 서울의 무역센타에서 개최 중인 국제 패션 페스티발을 특집으로 방송하였으며, 같은 날 몽골의 최대 축제인 나담축제를 맞이하여 서울시 강덕기 부시장의 인터뷰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것도 긴 시간을 할애하여 방영 되었다. 몽골말로 더빙 되어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매 도시인 서울과 울란바타르의 인연을 강조하고 양 도시간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축하 메세지가 아니였나 생각된다.

서울과 울란바타르의 영원함을 위하여 축배를 들자꾸나. 서울에서 불과 3시간 30분의 거리, 그 곳에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몽골인들이 한국을 솔롱고, 무지개의 나라로 부르고 있다. 지금부터 778년 전인 1219년, 동국병감(東國兵鑑)에 우리나라와 몽골의 관계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두 나라가 영원히 형제가 되어 자손 만대로 오늘을 잊지 말자(兩國永僞 兄弟萬歲子孫 無忘今日)’ 고. (’97. 10)


* 본 글은 “윤혁경의 건축법해설 홈페이지(http://www.archilaw.org) 나의 이야기 > 도시탐험”에서 발췌된 글로써, 일부 내용은 현재 법령등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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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도시연구정보센터 기획관리부 실장 윤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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